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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시스템 선진화를 위한 핵심과제

정영일 이사장님.PNG                                                                      정영일 (농정연구센터 이사장, 국민농업포럼 고문)

 

 올해로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지구촌 농업질서가 전면 개편된 지 24년째, 2004년 쌀협상의 결과 관세화에 따른 쌀시장개방이 이루어진지 14년째를 맞았다. 세계 각국은 농산물시장의 전면개방과 농업보조금의 점진적 감축을 의무화한 WTO농업협정의 기준에 맞춘 농정틀의 개편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먼저 지난 4반세기동안 국내외 여건의 엄청난 변화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농업‧농촌‧먹거리문제가 당면한 상황을 개관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상황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농정의 특징과 한계에 관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농정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정책시스템혁신의 중요과제와 전략에 관한 제언으로 이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암울한 한국 농업‧농촌‧먹거리의 현주소

 

 먼저 농업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성장과 소득간 괴리가 심화되는 농업성장의 한계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이전 연평균 3%내외에 달했던 농업성장률이 90년대 1.7%, 2000년대 0.1%로 거의 제로성장에 이르렀으며 사실상 축산만이 유일한 성장부문으로 남았다.

 생산구조면에서는 2016년 현재 쌀과 축산이 전체의 53.8%를 차지할 만큼 단작화와 편중이 심화됨으로써 농산물 소비구조의 다양화에 역행하고 먹거리 자급력이 크게 저하되고 있다.

농가실질소득은 90년대 후반 이래 하락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농업소득은 94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도시근로자가구에 대비한 농가소득의 비율은 90년대에는 거의 균형을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65%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농업소득 하락의 원인은 중간투입의 증가와 농가교역조건의 지속적 악화로 분석된다.

 소수농가에 대한 선별적 집중지원정책으로 판매액 1천만원미만 농가가 전체 농가의 67.8%에 이를 만큼 농가간의 소득불균형이 확대되어 5분위배율이 도시근로자가구의 4.4보다 월등히 높은 14.5에 이르고 있다. 대농의 경우에는 소득불안정에 더 크게 노출되고 있어 논벼‧과수‧밭작물농가들의 소득대비 부채비율이 2000년대 중반이후 높아지고 있다.

 영농주체의 고령화가 급진전되고 있어 미래 농업주체의 확보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농가경영주의 평균연령이 67세, 40세 이하 경영주의 비중이 1%에 불과한 연령분포구조가 위기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근년 귀농귀촌의 증가로 전체인구 대비 농촌인구의 비중은 20%를 약간 밑도는 수준에서 안정되고 있지만 정주여건이 비교적 양호한 읍지역으로의 인구유입은 증가하는 반면 면지역은 감소해 읍‧면지역간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그 결과 인구 2천명이하의 과소면이 2000년의 105개에서 15년의 261개로 급증했으며 가구수 20호미만의 과소마을수가 1,270개에 이르고 있다.

 

구조조정농정의 전개와 그 귀결

 

 한국 농정은 1989년의 농어촌발전종합대책 수립을 계기로 종래의 보호주의 농정으로부터 경쟁력강화를 핵심목표로 하는 구조(조정)농정으로 크게 전환하였다. 구조농정이라 함은 전면적인 시장개방을 전제로 농업을 수입농산물과 경쟁할 수 있도록 재편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 경쟁과 효율의 관점에서 규모화‧전업화를 강력히 추진해나가는 농정방향을 뜻한다. 따라서 정책중점은 전업농과 기업농 육성에 두어지며 구조농정을 일관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생산주의와 설계주의로 집약된다.

 생산주의란 농업증산을 가장 중시하고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그 속성은 ‘돈버는 농업’, ‘수출농업’, ‘첨단농업’ 등의 정책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생산주의 농정의 구조적 특징은 집약화‧집중화‧전문화이며 지난 20여년간 투입된 농업‧농촌분야 재정투융자의 60%이상이 생산 중심의 경쟁력 제고사업에 집중되었다. 설계주의는 철저하게 중앙정부의 계획과 지침을 바탕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수단으로 동원된 정책기법이다.

 그렇지만 역대 정부의 구조농정이 WTO체제와 2000년대의 새로운 발전전략으로 채택된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 아래 전개된 농업환경변화에 적극적‧선제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거시경제흐름에 대한 소극적‧수동적 대응에 그쳐왔으며 이해집단의 반발과 사회갈등을 무마하는 사후조치에 급급한 양상을 보여왔던 점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임기 5년 단임정부의 집권기간단위로 정책이 추진됨으로써 정책일관성에서 혼선이 빚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간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농촌정책과 식품산업정책이 농정영역에 새로 편입되었지만 농업경쟁력 강화라는 농정목표 아래서 이들 새로운 정책영역의 위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채 혼선을 거듭해왔다. 식품정책영역에서는 부처이기주의와 식품정책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식품산업정책과 식품위생정책간의 통합적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농촌정책의 영역에서도 관련부처간의 정책조정‧협의기능 및 콘트롤타워의 부재로 국민 삶의질 향상을 위한 종합적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다.

 지금 한국농정은 방대한 재정투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농가들의 소득감소와 경영불안, 급속한 고령화와 청년영농주체의 부족으로 인한 농업‧농촌의 소멸 우려, 지나친 집약농업과 환경부하로 인한 방대한 사회적 비용의 초래, 농촌공간계획의 부재로 인한 난개발의 심화, 국민건강과 먹거리안전의 확보를 위한 체계적 대응 미흡 등 총체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 농정시스템의 선진화를 위한 근본적인 혁신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있다.

 

농정시스템 선진화를 위한 몇 가지 제언

 

 한국 농정이 빠져있는 한계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대전제는 생산주의와 효율성에 치우친 낡은 농정이념을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다기능성(multifunctionality)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란 생산효율성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정책기준을 넘어 생태환경과 먹거리안전성을 지키면서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조화롭게 추구해가는 현대세계 공통의 가치를 말한다. 다기능성이란 농업‧농촌이 농산물생산기능 이외에 환경‧생태‧경관‧문화‧교육‧지역사회유지 등의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여러 종류의 편익을 제공하는 사회공통자본으로 공익적 기능을 갖는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농정이념의 대전환에 성공할 때 우리는 유럽연합(EU) 등 선진제국에서 보듯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다양한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농업‧농촌‧먹거리시스템을 구축하는 시대적 과제에 내실있는 진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농정영역과 대상에서는 농업‧농민을 넘어 소비자‧미래세대까지 포괄하고 소수의 상층농 중심이 아닌 영세농, 고령농, 여성농, 귀농 등 다양한 영농주체들이 아울러 발전할 수 있는 포용적 발전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정책추진방식에 있어 구조농정의 중앙집권적 설계주의 방식을 분권과 협치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지역특성과 지역주체의 창의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지역 중심의 생태계조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농정시스템 구축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나가야 할 최우선 정책과제는 직불제 개편이다. 그 핵심은 현행 쌀 편중 소득보전 목적의 직불제를 농업의 다기능성서비스 제공 즉 공익기능에 대한 사회적 보상지불제로 전면 개편하는 것이다. 아울러 환경친화적 축산 확립을 위한 체계적 규제와 보상시스템의 정립도 농업의 공익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의 증진을 위한 필수과제에 속한다. 국민 먹거리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범부처적 대응체계 확립과 농촌공간계획제도의 도입 등 통합적 농촌발전추진체계의 구축을 위한 먹거리 및 농촌정책영역에서도 범정부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지금 안고있는 농업‧농촌‧먹거리정책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념과 정책수단체계를 갖춘 선진화된 농정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농식품부 등 개별부처를 넘어 범정부적 대응과 입법‧예산을 관장하는 국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관여를 포함해 폭넓은 국민적 지혜를 모으기 위한 한시적 논의기구의 필요성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은 월간 「憲政」 2018년 3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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